2019년 10월 22일,
도로명 주소충청북도 충주시 대소원면 대소원로 108.

일제의 식민지 교육에 대한 학생들의 불만이 점점 높아가고 있던 중 1929년 11월3일 전남 광주에서 통학하던 조선인 여학생을 야유하고 괴롭히던 일본인 학생과 이를 말렸던 광주고보 학생들과의 사소한 충돌이 있었다. 이 사건을 조사하는 과정에서 일본경찰은 모든 책임이 조선인 학생들에게만 있다고 발표하며 편파적인 수사를 함으로써 학생들이 주동되었던 항일운동이 바로 그 유명한 '광주학생운동'이다. 광주학생운동은 1930년까지 전국적으로 파급되어 이 애국적인 항일운동에 참여한 학교 수가 194개나 되었으며, 참여 학생 수는 약 5만 4천 여명에 달했던 3.1운동 이후의 최대의 항일 민족운동이었다. 충주에서는 대소원 초등학교(보통학교)학생들이 광주학생운동에 적극 호응하였다. 대소원 초등학교는 그 당시 학생 수가 약360명, 교사는 6명으로 일인교사 3명, 조선인 교사 3명이 있었다고 한다. 대소원 학생 만세운동은 대소원 학교 졸업생이었던 이상열, 유신득 그리고 5학년에 재학 중이던 황후길, 김상쾌, 성낙일, 조태국이 중심이 되었다. 이들은 대소원 성공회 주교실(당시 주교는 영국인이었다)에서 밤새워 습자지에 그림물감으로 태극기를 만들었고 만반의 준비를 마친 이들은 거사일로 장날을 택했다. 거사 당일 2월(날짜는 불문명함) 점심시간에 각 교실을 다니면서 4학년 이상의 학생들은 장터로 나오라고 설득하여 약100여명의 학생들이 장터로 쏟아져 나와 우체국, 금융조합, 지서앞에서 "광주학생 사건 만세"를 목이 터져라 외치며 시위 행렬에 들어갔다. 당시 광주학생 사건으로 잔뜩 긴장해있던 일제는 "대한독립 만세"를 중대한 범법행위로 단속을 크게 강화했던 때라 이를 피하기 위해 "광주학생운동 만세"라고 불렀다고 한다. 대소원 지서의 연락을 받고 긴급 출동한 충주경찰서 순경들에 의해 이 날의 시위는 진압되었다. 약80명의 학생들이 지서에 연행되어 조사를 받았고 자의에 의한 참여를 주장한 15명의 학생을 제외한 나머지 사람들은 그 날로 훈방되었다. 이들 15명의 학생은 버스 편으로 충주경찰서에 이송된 후 3일간 철저히 심문을 받은 후 9명은 석방되고 6명은 29일간 구속조치 된 후 석방되었으나 당시 학교장이던 일본인 교장에 의해 강제 퇴학당했다고 한다. 이러한 만세운동을 기념하기 위하여 1985년 대소원초등학교 정문 동쪽에 기념비를 세웠다.
독립기념관 자료 링크(PC) http://sajeok.i815.or.kr/i815/view_region/804
제목: 대소원보통학교 학생만세운동지
기본정보: 사적지
분류: 국내항일운동사적지
운동계열분류: 학생운동
종류: 거리(시장)
상태: 멸실
대소원초등학교는 현재 한영아파트 자리이며, 성공회 교회는 현재도 대한성공회 대소원교회자리로 변함이 없다. 다만 태극기를 그리던 건물을 헐고 그 자리에 새로운 건물을 지었다고 한다.
정의: 1930년 2월 7일 대소원공립보통학교 학생들이 만세시위를 벌인 곳
관련 사건: 1930.2.7 대소원공립보통학교 학생 만세시위
관련 내용: 1929년 11월 3일에 일어난 광주학생운동의 여파는 충주에도 파급되었다. 1930년 2월에 대소원공립보통학교 5학년 학생들이 중심이 되어 대소원 성공회 주교실에서 밤새워 태극기를 만들고, 2월 7일에 4학년 이상의 학생들을 이끌고 대소원장터로 나아가 만세시위를 벌였다. 충주경찰서 순경들이 긴급히 출동하여 주동학생 10명을 연행하고 대부분의 학생들을 밤새워 신문한 후 훈방하였다. 이 때 충주경찰서에서는 이 사건과 관계 있다는 혐의로 지역 청년 5명도 취조하여 구류처분을 내렸다.
참고 문헌『동아일보』, 1930년 2월 12일, 「忠州 大召里公普生 萬歲, 장날에 만세를 불럿다고, 首謀十名이 被檢」.
『동아일보』, 1930년 2월 14일, 「忠州 靑年二名 引致取調 中」.
『동아일보』, 1930년 3월 6일, 「大召里事件 靑年五名 拘留」.
대소원보통학교 학생만세운동지100m© Kakao지역정보
당시 주소 충청북도 충주군 이류면 대소리
주소 충북 충주시 대소원면 대소리 132-2
도로명 주소충청북도 충주시 대소원면 대소원로 108
위치 고증: 『동아일보』 1930년 2월 12일자 및 2월 14일자에 관련 사실이 기록되어 있다. 현지조사에서 정문식(대소리 거주)의 증언을 통해 현재 한영아파트 자리가 대소원공립보통학교 자리였음과 성공회 교회는 그 당시 자리 그대로 존재하고 있음을 확인하였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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